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와 덴노/생애 (문단 편집) === 노년 === ||[[파일:showa tenno.png|width=100%]]|| ||[[파일:노년의 쇼와.jpg|width=100%]]|| || 노년의 모습 || ||[[파일:Hirohito-1982.jpg|width=100%]]|| || 1982년의 모습 || ||[youtube(JOIYgXzMSC4, start=1177)] || || [[1964 도쿄 올림픽]] 개회를 선언하는 쇼와 덴노(19분 37초) || 여하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쇼와 덴노도 여느 입헌군주국 군주와 같이 천황이라는 공적 업무인 '공무(公務)'는 그냥 새 헌법 하에서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수행했고, 대신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 연구에 관심을 쏟으며 이에 몰두했다. 1971년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전쟁 후 처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영국]]과 [[네덜란드]]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러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계 대학생들과 퇴역 참전용사들이 천황 히로히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 '''나는 옥좌(玉座)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고준 황후|황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이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이기도 하다.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 오사카 엑스포|1970 오사카 만국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이다.''' >---- >[[1975년]]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 1975년 10월에 히로히토 천황과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는 [[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히로히토와 [[뉴스위크]]지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버나드 크리셔는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陛下)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일본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면서 옛 신하들을 배려해주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몇 주일 후 천황 부부는 국빈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회담을 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과 위로의 뜻을 전하고,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를 찾았다.[* 그런데 이때 디즈니가 히로히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히로히토는 왜인지 손을 피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디즈니가 당황했다고 한다. 종전 이전에 천황과 대화할 때는 직접 말도 못하고 중간에서 시종이 전해주면서 대화를 하는 식이라 악수도 당연히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그 시절의 예절이 몸에 배어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디즈니랜드에서 선물로 받은 시계가 있는데, 디즈니랜드에서 일본 천황의 공식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특별 한정 기념품이었다. 히로히토는 이 시계를 받고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아름답다."며 마지막으로 크게 미소 지었고, 나중에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그 시계를 무덤 속에 넣었다고 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규탄집회가 일어난 것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특히 히로히토에 대한 증오가 엄청나서, 히로히토가 정원에 기념식수를 하자마자 한 사람이 다음 날 바로 나무를 베어버리고 '''뿌리까지 죽이기 위해''' 땅에도 [[제초제]]인 [[염소산나트륨]]을 부어버린 뒤 '''"그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They did not die in vain)"'''이라고 쓰인 팻말을 걸어 놓았다. 숙소인 호텔 입구에서는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며 소리질렀고 히로히토가 이를 무시하며 지나가는 소동이 빚어졌다. 전쟁으로 생긴 영국인들의 혐일감정은 엄청나서, 후일 참전용사인 [[루이 마운트배튼]] 공은 자신의 장례식에도 일본인들은 초대하지 않도록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고 이에 대한 일본 대사관 및 버킹엄 궁의 입장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미국은 미소냉전으로 동맹관계를 맺은 터라 별다른 일 없이 미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